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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나오면다시시작되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 김초희)

*스포주의 / 영화관련 내용 거의 없음 주의

 

지난달 초에 처음으로 독립영화 극장을 찾았다.

집에서 vod나 스트리밍으로 독립영화를 봐왔어도 직접 극장을 방문한 적은 처음이였다.

이 영화를 본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야 리뷰를 쓴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 영화가 재미없었다.

일단, 화면구도가 너무 좁은 느낌이어서 전체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주인공 찬실을 연기하는 분의 연기가 너무 어색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연극하시던 분을 섭외했다는 인터뷰를 봐서 그런지 영화 내에서도 연극톤이 나타난 느낌이었다.

차라리 이 내용이 소설이었다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래서 이 영화가 썩 인상깊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났다.

이 글을 쓰는 블로그 카테고리명이 '영화관을나오면다시시작되는'이다.

재미있는 영화를 리뷰하는 게 아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만큼 이 영화가 내 머릿속을 꾸준히 스쳐지나갔는데, 어제도 그랬다.

그래서 (유사) 리뷰를 쓰기로 결심했다.

 

어제 밤에 이 영상을 봤다.

나는 요조님의 열렬한 팬이다.

가수로서 좋아한다기엔 노래가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작가로서 좋아한다기엔 요조님이 쓰신 책 중 읽어본 것이라고는 '아무튼, 떡볶이' 밖에 없다.

그런데 유튜브 '책, 이게 뭐라고' 채널로 완전 입덕해버렸다.

그럼 유튜버로서 좋아한다고 해야되나.

아무튼 유의미한 고민을 해주게 한다는 점에서 요조님을 좋아한다.

위 영상도 요조님 채널에 올라온 영상이다.

 

'죽음'에 대한 3가지 질문과 짧은 답변들로 구성된 영상인데,

가장 인상깊었던 질문은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걸 아는데,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영상에서 김상욱 교수님이 답변한 내용이 나를 정말 띵ㅡ하게 만들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에만 살아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 말은 즉슨,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죽어있는 상태'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고,

'살아있는 상태'가 굉장히 이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실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 죽음으로 조금씩 가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어떻게' 살아야하고, '왜' 살아야 하는 지는,

인간의 역사, 인간의 문화가 규정하고 이루어온 인간 사회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답을.

 

돌이겨보면, 내 미래를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은 시점부터 나는 얕은 우울증을 기본값으로 가져왔다.

나에게 주어진 삶은 단 한 번 뿐이기에 내 인생을 구성할 것들을 결정하는 데에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것은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일까 등등.

이러한 고민은 '죽음'이라는 문 앞에서 되려 '무의미'함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떠한 자극도 없는 휴학 생활에서 더더욱 깊이 인생의 덧없음을 체감하고 있다.

게다가 넷플릭스에서 미국의 숨겨진 외계생명체 연구지 51구역의 존재를 고발한

밥 라자르의 다큐멘터리 '밥 라자르:51구역과 UFO'를 보는 바람에

며칠 간은 정말로 진심으로 심각하게 '인간으로서의 삶'을 의미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외계에서 볼 때 우리는 그저 '지구'라는 새장에 갇힌 새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조님과 김상욱 교수님이 '죽음'에 대해서 대화한 저 영상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때,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다시 한번 스쳐지나갔다.

 

영화 내에서 장국영은 이찬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열심히, 정말 정말로 열심히,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 한다고.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저게 이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세지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이 장면이 계속 맴돈다.

찬실이는 결국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쓰더라도, 당장 돈을 못벌더라도 다시 '영화'를 하기로 결심한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드는 생각이, 아니, 사실 계속 느껴온 것이,

내가 나와 '일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안든다.

뭔가 나답지 않은 삶을 나도 모르게 욕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내 안에서 끄집어낸 열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듬어진 예쁜 욕망을 갖고 사는 느낌이 든다.

 

근데 문제는 '사회'라는 개념이 너무나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삶의 형태와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아주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다.

'정보의 호수'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곤 하는데,

그만큼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이 한꺼번에 쏟아져 '경험되고'있다.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은 부딪히면서 배울 법도 한데 '좋은 삶'의 메뉴얼이 너무나 많이 제공되고 있다.

손쉽게.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좋은 삶'에 대해서 다른 답을 내놓는 사람들이 미디어 공간에 공존하고,

우리는 여러 가지 답에 휘둘리기 아주 좋은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성실하게 공부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삶, 현재에 집중해서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

부모님께 효도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삶, 나의 커리어에 집중하는 삶 등.

어느 것이 맞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느 것을 선택하는 지는 나에게 달렸다.

하지만 이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현실의 상황과 타협하기 힘들다면 가치를 잴 수 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내적 갈등이 심화되고, 의미를 따지게 되며, 이는 무의미를 발견하는 데 가속제가 될 뿐이다.

 

미디어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예쁜 욕망'의 모습, 현실에서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예쁜 욕망'의 모습대로

정신없이 내 욕망을 깎고 다듬다보면 남는 게 없다!

나는 이것이 나에게 무기력함과 우울감, 비일체감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장국영의 말처럼, 이찬실처럼, 아주아주 열심히 내 안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 영상에서 송길영님이 조언해주신 여러가지 말 중에서도 지금의 내가 새겨들은 말은,

'지금 1,2년 고민하는 시간을 아까워 하지 마라'는 것이다.

 

요즘 누워서든, 앉아서든, 밥을 먹으면서든, 핸드폰을 보면서든,

계속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고, 어떤 일에 대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맞는가라는 자문을 끊임없이 하는데,

아무것도 안하면서 이런 고민만 하고 있는 내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고민의 긴 시간들이 내 미래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스스로가 완전히 납득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색하고 깊이 고민하기로 했다.

 

나 스스로에 솔직하고 나다운 하루하루로 채워진 인생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