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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나오면다시시작되는

아멜리에 (2001, 장피에르 죄뇌)

*스포주의

누군가가 그랬다. 누가 누군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Joy라는 말이 좋다고.

삶을 사랑하고 소중히 대하는 걸 다 떠나서

Joy. 즐기는 게 좋은 거라고.

 

작게는 순간, 길게는 삶을 어떻게 대해야 될 지 잘 모르겠을 때가 있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하루를 날렸을 때,

찾는 물건이 눈에 보이지 않아 짜증이 밀려올 때,

다이어트 강박 때문에 맛있는 쿠키를 앞에 두고 망설일 때,

이런 순간들마다 삶에 대한 고민으로 생각이 확장된다.

명확한 신념도, 긍정적인 사고 회로도, 좋은 습관도 없으니까

자주, 그리고 깊게 어떤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게, 하지만 끝에선 이미 빠져나오기 힘든 어둠 속을 헤매이게 된다.

 

그래서 때때로 장기적이고 확실한 관성같은 걸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주 작은 선택부터 큰 결정까지 나를 이끌어줄 만한 심지.

그것은 아마 어떤 삶의 태도 일 것이고, 나는 종종 영화 속에서 끌리는 답을 찾아낸다.

 

주인공 아멜리는 상상력을 친구로 삼는다.

어렸을 때 아멜리에가 심장병이 있다고 오해한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홈스쿨링으로 길러낸다.

이 때문에 친구 하나 없이 지낸 그녀는 상상을 하거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쩌면 슬픈 일이지만, 그녀는 집에서 발견된 보물상자의 주인을 찾아준 일을 계기로

남을 돕는 것이 인형과 노는 것보다 낫다면서 불행한 남을 돕는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내가 하는 행동, 내가 만들어낸 일의 가치를 가장 확실히 느끼는 일은

그것이 남에게 어떤 좋은 영향을 가져다주었는 지 알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아끼는 것이 곧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고들 하지만

솔직히 난 시선이 나에게 향할 수록 오히려 그렇게 되기 힘들게 여겨진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거나, 세상의 발전에 작게나마 이바지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때만

내가 아무리 오늘 우울한 날이었어도 "어쨌거나" 누군가를 위한 행동을 했잖아? 라고 위안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 채식 도전 7일차가 되는 날인데, 며칠 간 특별히 생산적인 일을 하진 않았으나

환경이나 동물복지를 위한 작은 도전을 행한 요즘이라는 좋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아멜리는 자신 때문에 아내와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고 아내를 떠나보낸 아빠를 위해

그가 아끼는 인형을 스튜디어스 친구에게 맡겨 여행을 시키고 그 사진들을 아빠에게 부쳐 아빠가 여행을 가도록 이끈다.

또, 바람난 이후 교통사고를 당한 남편을 몇년 간 잊지 못하는 마들레느를 위해

그녀가 모아둔 남편의 편지들을 몰래 가져가 조작해 그녀에게 죽기 전 남편이 남긴 척 사랑 편지를 만들어 보낸다.

5년간 외출을 하지 않고 사람을 피하는 이웃 라파엘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는가 하면,

직원에게 악담을 하며 대놓고 폄하하는 나쁜 채소 가게 주인을 골탕먹이고,

같이 일하는 카페 동료 여자와 자신을 찬 여자를 잊지 못하는 남자 손님을 이어주기도 한다. (이건 좀 결과가 나빴지만)

그러던 중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 자신의 행복을 찾고자 운명이라고 여겨지는 남자에게 다가가려는 작전을 짠다.

아멜리에는 곳곳에 수수께끼 같은 미션들을 숨겨두고 운명의 남자가 자신을 찾아 오도록 이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아멜리에만의 방식이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감정선이 재치있게 그려져있다.

 

삶의 의미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는 요즘, 아멜리에는 나에게 어떤 긍정적인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가장 보람차다고 여겨지는, 가장 마음이 풍요로워질 수 있는 행동으로 즐겁게 나의 하루 하루를 채우는 것.

타인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도 나의 행동을 찾기 위해서도 바리전히 움직이는.

지구의 역사로 보았을 때 사람의 삶은 정말 한순간이다. 길지 않다.

그 짧은 시간동안 함께 지구에 떨어진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는 것은 어쩐지 숙명처럼 여겨진다.

 

아멜리에를 다 보고 나서 나는 다른 영화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오베라는 남자 (2015,한네스 홀름)>, <바그다드 카페 (1987,퍼시 아들론)> <카모메 식당 (2006,오기가미 나오코)>

세상에는 '자기 자신과 수많은 타자'가 존재하는 여러 인생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이 영화들은 그저 존재하는 타자가 아닌, 함께하는 타인으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그려낸다.

 

<오베라는 남자>에서 주인공 할아버지 오베는 아내를 따라 죽고 싶어하는데,

죽기 직전에 해야할 일이 있다며 까칠하지만 따뜻하게 이웃들을 돕다가 세상을 떠난다.

<바그다드 카페>에서 백인 여성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카페와 숙소를 운영하는 흑인 여성의 삶에 들어와

청소를 해주고 카페를 꾸며주면서 따뜻한 활기를 불어넣고 떠난다.

<카모메 식당>에서 주인공 사치에는 어쩌다 핀란드로 오게 된 미도리와 마사코를 식당으로 초대하고

함께 일하면서 따뜻한 우정을 쌓아나간다.

 

<아멜리에> 뿐만 아니라 이 세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타인에게 손을 내민다.

실시간 라이브인 '자신의 인생'에서 어쩌면 정말로 짧은, 스치는 장면에 불과할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잡아주고 따뜻함까지 베푼다.

내가 사랑하는 책 중 <단순한 진심(조해진)>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 대한 평론을 한 김미정 문학평론가는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단순한 진심>의 타자들은 내 삶에 '스며드는' 존재다."

 

이 영화들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을 그저 내 삶에서 지나가는, 그저 한 공간에 존재할 뿐인 누군가로 여기지 않고,

내 삶에 스며드는, 그래서 당연하게 마음을 나누는 함께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 당연함을 자연스럽게 녹여 그려낸 것이 이 영화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오베라는 남자>에서는 심장이 커서, <바그다드 카페>에서는 묵어가는 숙소니까,

<카모메 식당>에서는 타지에 온 고향 사람들이니까, <아멜리에>는 인형이랑 노는 것보단 재밌으니까,

타인에게 손을 내민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바지런히 남의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데도

주인공의 삶에 행복이 퍼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어느새 깨닫는다.

 

<아멜리에>에서는 타인의 행복을 찾아주는 모습과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가는 모습이 차례로 각별히 그려진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멜리에의 행복을 어느새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멜리에>는 내용 뿐만 아니라 '영화'로서의 매력도 넘쳐 흐른다.

따뜻한 분위기의 영화 장면 군데 군데에 어색하지 않게 판타지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

어린 아멜리에가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하늘에 완벽히 토끼의 모습을 한 구름이 지나가는가하면,

아멜리에가 보고 있는 티비 속에 갑자기 그녀가 등장하여 나래이션이 그녀의 인생을 설명하고,

보고싶어하던 니노 앞에서 한 마디로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고는 물로 변해서 바닥에 쏟아지고 만다.

뿐만 아니라 아멜리에가 상상하는 장면이 그대로 영화 중간에 삽입되어 보여진다.

 

나는 영화 속 현실과 동떨어진, 주인공만의 세계가 드러나는 장면이 삽입되는 것에서 큰 매력을 느낀다.

주인공에게 더욱 몰입하게 될 뿐만 아니라 주인공과 감정을 완전히 공유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효과가 굳이 아니어도 '상상'이라는 건 언제나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위를 넘나들고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고 재밌다.

특별히 그녀가 물로 변해 쏟아져 버리는 장면은 때때로 물에 둥둥 떠있는 듯한 감정을 느끼고는

영화 속에서 이를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던 나에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가져다 주었다.

 

삶을 혼자서 즐길 수 있을까.

타인과 함께 할 때, 아니 내 삶에 잠시라도 머무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야 비로소 진정으로 삶을 즐길 수 있는 것 아닐까.

누군가의 말처럼 삶을 즐기기 위해 타인에게 스스럼 없이 손을 내밀고 싶다.

손 잡고 춤을 추든 흥겹게 노래를 부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