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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나오면다시시작되는

윤희에게 (2020, 임대형)

*스포주의

 

넷플릭스 상단에 올라와있을 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쀼의 세계를 열심히 봐서, 배우 김희애가 영화 포스터에 있는 게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릭조차 안했다.

그런데 내가 구독하고 있는 채널인 소그노에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고,

남은 내용을 마저 보지도 않고 바로 넷플릭스 어플을 켜서 <윤희에게>를 관심 영화에 담았다.

 

알바를 안하는 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 괜히 기분이 나빴던 날에

힐링을 하자며 넷플릭스로 <윤희에게>를 보았다.

 

뭔가 거대하고 묵직한 공기가 내 가슴 깊숙히 들어왔다가 스르르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그 공기의 부피만큼 내 안에 어떤 공간이 만들어졌다.

<윤희에게>는 이런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넓고 추운 공간에서의 작고 따뜻한 사랑을 그린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거리감과 눈이 많이 온 겨울이라는 설정이 어딘가 쓸쓸하고 허전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도입부에서 나래이션으로 깔리는 편지 내용을 보면 어느 시점으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긴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이 시공간감각적으로 멀고, 또 먼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에서는 아주 가깝고도 따스한 관심과 사랑이 묻어나 보인다.

엄마 윤희의 옛날 이야기를 삼촌과 아빠에게 묻는 딸 새봄,

윤희의 집을 자주 찾아가 비타민을 건네며 귀찮게 하는 인호,

쥰을 안아주는 쥰의 고모 마사코,

새봄에게 리폼한 털장갑을 선물하는 경수 등.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인물들의 대화 소리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영화 밖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거대한 차가움 속 작은 따뜻함이라는 대비 덕분에

인물들의 세밀한 감정선이 더 두드러진다.

어느새 몸을 화면 쪽으로 기울이는 것도, 마치 추운 겨울 몸을 안으로 더 웅크리게 되는 것처럼

영화 속에 빨려들어간 내가 인물들의 마음에 더 귀기울이게 되는 것같다.

나는 인물들의 대화가 주가 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데,

<윤희에게>는 대화가 특별히 많진 않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서로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져서 좋았다.

뿐만 아니라 윤희-새봄, 마사코-쥰의 데칼코마니 같은 대화 내용,

수미상관을 이루는 쥰이 윤희에게, 윤희가 쥰에게 보내는 편지 나래이션같이

독특한 영화적 장치들이 대사들로 하여금 마음에 더욱 와닿게 만들었다.

게다가 안그래도 세밀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말과 글에 매료되는 나로서는

윤희와 쥰의 행동과 대사만으로 서로를 향한 감정선이 드러나는 이 영화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소그노 영상을 봐서, 중년 여성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영화 초반부에서 주인공 윤희가 같은 여자인 쥰을 사랑한다는 걸 눈치챘다.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

이 영화는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한 사회의 시선(윤희의 편지에서 정신병원에 다녔었다는 이야기)

편지와 대화(식당에서 쥰과 료코와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면서,

폭력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들의 내면의 목소리로서 전달한다.

또한, 엄마 윤희를 향한 딸 새봄의 애정으로 시작된 여행 계획 덕분에 윤희가 쥰을 만나게 되는 설정은

지금껏 모성애 또는 과잉보호 및 걱정-반항, 딸에 과거의 꿈을 투영하는 엄마 등

기존에 그려졌던 엄마-딸의 관계와는 조금 달라보인다.

이러한 부분도 이 영화를 더욱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배경과 인물의 온도 대비,

인물 간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화,

독특한 영화적 장치 및 연출,

겨울의 고요함 가운데 세밀한 감정선이 드러나는 인물들의 연기 등

한마디로 "따뜻한" 이 영화가 밀도 높은 공기로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왔다.

그 공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커다란 공간을 만들고는 스르르 빠져나갔다.

 

영화는 끝났지만,

나에겐, 어떤 마음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뜨듯히 데울 수 있는 깊고 넓은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