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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나오면다시시작되는

결혼이야기 (2019, 노아 바움백)

*스포주의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인생영화'들이 있다.

보통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흐름이 좋다'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가 전하는 메세지가 좋다'이다.

대표적으로 나에겐 애니메이션 <라따뚜이>가 전자의 이유로 인생영화가 되었고,

<오베라는 남자>는 후자의 이유로 인생영화가 되었다.

 

그런데 '영화' 자체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터, 

그러니까, 영화의 내용과 형식, 영화가 나에게 주는 의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전반적인 영화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인생 영화'가 되는 이유도 다양해지고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들 중 가장 특별하다고 꼽을 수 있는 표현이 생겼다.

이 글의 카테고리 제목이기도 한,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시작되는' 이다.

이는 크레마 북클럽으로 읽게 된 책(김호영 저)의 제목인데, 여러 프랑스 영화들의 내용과 그 감독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옳건 그르건, 신기하게도 프랑스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이 어긋남 혹은 선 넘기의 경험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우리를 따라다닌다.

영화관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와도 어딘가 한구석에 남아 끊이없이 말을 걸어오고,

어쩌다 긁힌 상처처럼 정신의 어딘가에 새겨져 희미해질 때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p.7(e-book)"

 

몇 달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각자 어떨 때 영화를 보는 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대체로 난 주어진 빈 시간을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보곤 했다.

야식 먹으면서 볼 만한 영화를 찾거나,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영화를 보거나 등등.

일상 사이에 끼워진 잠깐의 쉼터같은 느낌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책의 저자 또한 "'잘 만든'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적절한'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가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한층 가벼워진 머리로 재빨리 바쁜 일상에 되돌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하고

객석을 떠돌았던 사고의 편란들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영화를 보는 순간에서 벗어나면 재빨리 나의 현실, 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어보면 이때 이야기하는 '잘 만든 영화'의 기준을 어디까지나 '잘 팔리는 가'이다.

대중들이 영화를 보는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적당한 선을 지키는 영화.

하자만 이 책엔 그런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죽기 직전 애지중지하던 딸에게 숨겨왔던 증오감을 드러낸 아버지에 대한 영화,

재능이 없는 무명작가와 안정된 가정을 욕망하는 제자의 가정 파괴 공모에 대한 영화 등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정한 영화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한 불편함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어지고, 앞선 표현처럼 긁힌 상처마냥 관객을 계속 따라다닌다.

 

내가 보는 웹툰 중 네이버 웹툰에 <하루>라는 웹툰이 있다.

웹툰 주인공이 영화 관련 학과인 것 같은데, 거기서 교수님이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인생 영화'는 자신의 감성, 감정과 공감이 되는 영화라고 생각해"

그러면서 <재밌게 본 영화가 왜 재미있었는지> 써보는 과제를 내주신다.

신기하게도 내가 보는 유튜브 채널 중 "영화하는 나부랭이" 유튜버 분도

영화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내가 재밌게 본 영화를 왜 재밌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셨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여러 매체들을 통해 '영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나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 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결론은 책에서 본 프랑스 영화들처럼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시작되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잔상이 일상에 남아 관객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였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고민하고 그 결론을 얻은 뒤로부터는

영화들을 볼때마다, 내가 재밌게 보고 나의 일상에 들어오는 영화들을 꼽아내기 시작했다.

즉,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에게 오래 남아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의 동기부여가 되는 작품들이

나에게 '인생영화'로 자리하게 되었고, <결혼이야기>가 그 중 하나이다.

 

<결혼이야기>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일단, 긴 호흡의 대사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 니콜이 이혼변호사 노라에게 이혼을 결심하게 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원테이크로 찍은 것 같았는데 그렇게나 긴 대사를 통으로 외워 감정을 실어 연기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편집이 되지 않아서인지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연속적으로 속부터 차오르는 감정이 묻어났고,

니콜을 연기했던 스칼렛 요한슨이 사실 원래부터 니콜이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남편을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느껴왔던 감정들을 섬세하고 강렬하게 전달하는데

이혼을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감정선, 그 흐름에 관객인 나까지 완전히 몰입되어버릴 정도였다.

한때 잘나갔던 스타배우로 남은 자신의 위치, 남편의 성공으로부터 느낀 꿈에 대한 좌절감,

부부관계에서 외면된 자신의 세계,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의 욕망,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자각.

스스로를 위한 더 나은 삶을 꿈꾸는 한 사람이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기까지의

구체적인 내면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사였다.

이런 대사들은 현실을 담아낸다는 영화의 의미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 놓인 한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의 목소리를 듣는 경험은 중요하지만 어려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삶에 보이지 않는 무책임한 폭력을 저지른다.

그들의 내면에 무엇이 담겨있는 지 고려하지 않고, 보여지는 것만에닠 집중하며 본인의 생각을 늘어놓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이 대사는 한 여성이 이혼이라는 선택에 있어

'자신의 세계', '자신의 꿈'을 추구했다는 것을 보다 확실히 보여줬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인상적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다양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은

어쩌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싶다.

 

두번째로 인상 깊었던 대사는 니콜과 극중 전남편이 될 찰리가 싸우는 장면에서의 둘의 대화이다.

솔직히 여기서 얼마나 몰입하게 되었는지, 얼마나 가슴을 쥐어짜는 기분이 들었는지를 글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영화 안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물들이 화면 밖으로 튀어 나온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너무, 완전히, 마음이 다해서 내 마음이 둘로 쪼개져서 하나는 니콜에게, 하나는 찰리에게 가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이혼을 앞둔 두 사람이 부부의 삶과 개인의 삶, 그 경계와 조화에 대해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왔는지,

두 사람 입장에서 모두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어서 어쩔 줄 모르게 될 지경이었다.

격렬히 말싸움을 하다가 자신이 뱉은 말에 스스로 무너져버리는 찰리와 이를 이해하며 등을 토닥이는 니콜의 모습으로

마무리 되는 이 장면은 두 개인의 만남인 부부라는 관계의 이면을 너무도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여줬다.

 

세번째로는 니콜이 이혼하기 전 양육권을 위한 부부 상담사와의 면담을 연습하는 장면에서

변호사 노라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엄마와 아빠의 역할에 대한 통념을 맹렬하게 까는 대사이다.

가장 좋아했던 대사는 이것이다.

 

"아빠는 실수투성이라 사랑하죠. 하지만 엄마가 그런다면 사람들은 다 들고 일어나요.

구조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우리의 유대교, 기독교 뭐든 간의 그 뿌리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완벽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마리아는 동정녀로 아이를 잉태했고, 꿋꿋하게 자식을 부양했으며, 죽을 때는 시체도 끌어안고 있었죠.

근데 아빠는 거기 있지도 않았어요. 심지어 섹스도 안 했죠.

하나님은 천국에 있었고, 하나님은 아버지고, 나타나지 않았죠."

 

사실 매체에서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나도 무감각했을 것 같다.

미우새에서 철없는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옹호받는 아들의 모습,

똑같은 행동을 함에도 다른 자막이 달리는 나혼산의 여자와 남자 연예인들 등.

이를 지적하는 뉴스가 나오고, Dua Lipa의 Boys will be boys를 들으면서, 또 이 영화를 보면서

여성, 아내, 엄마에게 강요되어온 사회적인 통념을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여자로 살면서도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무감각했던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노라의 이 대사를 통해 나를 둘러싸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강요되어 온 것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촬영 구도도 노라가 서서 앉아있는 니콜에게 말하는 시선 그대로를 담았는데

이 때문인지 저절로 니콜의 입장에서 노라의 말을 경청하고 새겨듣게 되었다.

 

나를 매료시킨 대사들, 그리고 이를 긴 호흡으로 담아내는 촬영방식, 거기에 굉장한 연기력까지 더해서

영화 곳곳에 사랑하는 장면들이 많이 생겼다.

영화를 총 3번 정도 봤는데, 흐름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이혼하기 전 부부로서, 함께 가정을 이룬 사람으로서 서로를 사랑했던 순간들의 장면들이 이어지고,

이혼 상담, 찰리와 니콜이 동료로서 함께 해 온 삶, 니콜이 원했던 삶 (LA에서의 작품 출연 - 노라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찰리가 살고 있는 삶과 부부 관계에 대한 생각 (변호사 고용 - 뉴욕 연극 준비), 이혼서류 및 소송을 두고 겪는 갈등

니콜과 찰리 각각 아들 헨리와 보내는 하루를 통해 보여지는 양육 방식, 이혼 이후 변화된 각각의 삶,

첫 장면과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며 영화 전체를 둘러싸며 보여지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부부의 모습까지.

개인의 삶과 부부, 부모로서의 관계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고 타협적인 정답을 찾아나가는 모습을

담담하지만 강렬하게 담아낸 <결혼이야기>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들때마다

꾸준히 내 마음 속을 들락날락 거렸다.

그만큼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본받고 싶은 영화이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의 종류는 단일하지 않다.

어떤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는 명확한데,

관객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안하게 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마음 속 깊이 사무치듯 침투되는 메세지를 담아 오래 잔상이 남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아마 영화적 고민은 내가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그리고 영화를 만들면서도 쭉 이어질 듯 하다.

나에게 어떤 장면을 사랑하는지 더욱 명확히 알게 해준 <결혼이야기> 영화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