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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나오면다시시작되는

세 얼간이 (2009, 라지쿠마르 히라니)

*스포주의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다.

 학창 시절을 지내오면서 물론 어려운 공부도 있었지만  못하는  없었던  같다.

힘든 과목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얼추 이해하는 편이었고,

친구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알려주는 데에도 익숙했다.

점점 커갈수록 더욱 똑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지만 그래도 위축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으레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라는 틀에 갇혀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환경에 던져진다.

일단 학교에 들어가면 받아쓰기와 산수를 왕창 시키고,

중학교에 들어가면  때부터 국영수, 고등학교 때는 사탐, 과탐 등등

정해진 틀에 맞는 과목들을 쏟아부어주는 식이다. 

(다른 과목들도 물론 많았지만 주요 과목이라며 국영수에 치중하는  모두가 다 안다.)

나는 아주 어렸을  책을 많이 읽었고, 동생과 같이 레고로 집과 차를 만들고 사고 파는 놀이를 많이  덕분에

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줄곧 잘하는 편이었다.

이건 정말 운이 좋았던  같다.

내가 잘하는 것이  사회에서 원하는, 틀에 맞는 것이었으니까.

 

잘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많이 받고, 주변에서 좋아해주면 그것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욕심은 좋은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학생들을 줄 세우는 광장"에서는

순수한 에너지원으로 쓰이기 힘들다.

욕심이 곧 타인에 대한 경쟁심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심화되면 즐거움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스트레스와 검은 욕망만 남는다.

나도 때때로 그런 굴레에 빠졌었다.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던 공부에 대해 뒤쳐지는 일이 생기면 괜히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거나 나 자신을 자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성적으로 학생의 등급을 매기는 이 광장에서는 그것이 곧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에

보여지는 숫자를 마냥 외면하기는 힘들며, 여기에 한번 집착한 이상 빠져나오기 어렵다.

 

솔직한 말로,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나의 알맹이는 이 영화로 가득차있다.

 

이 영화는 나의 가슴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준다.

벅차는 감동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며,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나에게 여러 모습들이 있지만 특히 공부를 하는 학생으로서 나에게 정말 많은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준 영화였다.

성적과 등급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충분히 즐겼고, 최선을 다했으면 된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스스로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힘이다.

 

주인공 란초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한 학생이다.

그런데도 다른 친구들과 달리 학벌과 성적에 집착하지 않고, 수업도 마음대로 들으며 즐긴다.

들뜬 모습으로 수업을 듣다가 교수님한테 혼나기도 하고, 다른 학년 수업을 듣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게다가 교수님의 질문에 대해 발칙한 질문으로 재질문하며 도리어 교수님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학교를 '막' 다니는 듯 하지만 진정으로 공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란초는 언제나 일등을 놓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룸메이트가 된 파르한과 라쥬는 각각의 이유로 공학을 즐기지 못하고, 성적도 언제나 낮게 나온다.

파르한은 사진작가가 되고 싶지만 집안의 압박으로 인해 억지로 공학을 선택했고,

라쥬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감으로 인해 공학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구들에게 란초는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을 따르라고, 모든 것이 잘 될거라고 믿고 나아가라고, 친구들을 끊임없이 독려해준다.

 

이 뿐만 아니라 학교의 시스템적인 문제에 있어어도 서슴없는 비판을 날린다.

그저 경쟁만을 강조하고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학교 교육 방식 대해 명확히 꼬집고,

자신만의 재치있는 말솜씨와 상황극으로 많은 이들을 납득시킨다.

등수에 매우 집착하며 자신의 성적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동기를 골탕먹이기도 하고,

공부를 하고싶지만 돈이 없어 학교 잔심부름 일을 하는 아이에게 돈을 쥐어주며 교복을 사서 몰래 들으라고 얘기해준다.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정말 대차게 행동하는 란초를 보고 있으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좇아 신나게 살아가도 될 것만 같은 벅찬 기분이 든다.

 

긴 학창 시절 동안 묵혀온 습관으로 '공부를 안하는 상태에 있으면 죄책감이 드는' 무거운 마음을 가벼이 만들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도전해버리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은 모두 이 영화 속 란초 덕분이다.

때때로 다시 공부를 의무감으로 하게 될 때나 좋아하는 일 앞에서 이것저것 재고 따지게 될때

란초가 옆에서 영화 속 주옥같은 대사들을 읊어주는 느낌이다.

경쟁과 가성비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잘못된 것이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맞다고,

확신을 심어준다.

 

한 편의 에세이에 담기 힘들 만큼 나는 이 영화에 의지를 많이 했다.

항상 곁에서 함께 공부하는 길을 걸어준 친구들만큼이나 이 영화는 나의 내면에 머물며 나를 단단히 일으켜 세워줬다.

나는 여전히 공부 자체에 욕심이 많고,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도 너무나 다양하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점점 깨닫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하고자 하는 것들에 우선순위를 매기게 되고, 때때로 사회의 기준이 고개를 내밀 때가 많다.

돈 많이 벌 수 있는 것, 높은 지위를 갖게 해주는 것, 좋은 근무 환경을 가질 수 있는 것 등등.

물론 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내 가슴이 뛰느냐의 조건이 뒤로 밀리려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란초, 그리고 파르한과 라쥬가 어떻게 가슴 벅차는 삶을 쟁취해냈는 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선택일지, 내가 그 선택을 했을 때 내 미래의 표정은 어떠할지 예상이 된다.

 

영화는 세상의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SF물이라 할지라도 일정 부분 세상을 비추고 있고, 반영하고 있다.

그 만큼 보이지 않는 세상을 열어주고 통찰력을 길러주기도 한다.

세얼간이는 학창 시절의 나에게, 세상에 발을 들였을 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알려준 영화이다.

비단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상을 누릴 인간으로서도 말이다.

 

세상의 정답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니까 돈방석에 앉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 인생의 정답은 무엇일까.

내가 만드는 정답을 따라가는 것 아닐까.

정답을 유연하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맞추어 나가면서 말이다.

인생이 객관식이라면 너무 재미없으니까!

 

고백하자면 내가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최면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내가 머리 좋은 지 안 좋은 지 나도 모른다.

성적도 오락가락하고, 어디에 스카우트 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안담.

고등학교까지의 성적은 정말 과거일 뿐이고, 지금의 내가 비상한 두뇌를 갖고 있는 지 없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고자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지구력과 열정으로

두뇌를 열심히 돌릴 수 있는 힘은 있다는 것이다.

 

뭐가 되었든 잘 될 거다 나는.

알이즈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