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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나오면다시시작되는

아웃 & 인 (2018, 미리암 아지자)

*스포있음. 

사진 출처 : https://hayunalesbianaenmisopa.com/2018/07/05/los-gustos-y-los-colores-bueno-no-se-regular/

프랑스에 오니까 넷플릭스 사용 국가도 달라져서 진짜 볼게 거의 없다.
왜냐면 한국어 자막 지원이 되는게 거의 없어서.. 오늘 보기 시작한 영화는 영어 자막을 틀어놓고 보고 있다.
그런데 자막조차 해석해야 하느라 집중력이 떨어짐.
 
그래서 내용 상관없이 호러만 아니면 일단 재밌을 수도 있으니 한번 봐보자 라고 생각하고
관대한 기준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선택해서 보고 있는데, 
영화 <아웃 앤 인>, 프랑스어 원제로는 <Les Goûts et Les Couleurs>, 직역하면 '맛과 색'이란 영화를 보게 됐다.
사실 관대한 기준으로 줄거리를 살펴서 얻어 걸렸다기보단 줄거리 자체도 흥미롭긴 했다.
꼼꼼히 읽어본 건 아니었지만 무슬림, 레즈비언만 보고도 일단 틀었음.
원래도 다양성에 관심이 많았지만 외국에서 지내면서 실제로 무슬림, 레즈비언, 게이 등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나니
이 주제가 사뭇 낯설지 않고 오히려 내 삶의 반경 안에 있는 주제들로 느껴진다. 
 
보는 와중에도 계속 재밌었고, 보고 나서도 이건 진짜 불어 공부용으로 계속 봐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심지어 바로 다음 날에 한 번 더 봤음.
하지만 이렇게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시작되는' 영화를 리뷰하자는 블로그 카테고리 취지에 아주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뒤로 계속 궁금해하고 상상을 했다.
저들의 삶은 이제 어떻게 이어질까.
 
세상엔 여러가지 사랑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안다. 알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공감하는 건 다른 문제다. 공감을 해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에는 대개 배타성을 보이는데, 사실 그럴 이유가 없다.
존중을 선택하면 된다.
마치 나와 다른 상대, 나와 다른 방식의 관계성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면,
이들과 비슷하거나 같은 것으로 오해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극히 경기를 보이며 배척하곤 하는데 
인정과 존중의 방식이 다양화되지 않고, 오히려 부재하는 수준에 가까워서 그런 것 같다.
세상을 좀 더 촘촘히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그게 무엇이든.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이 영화는 거의 뭐 다비치의 <두사랑>처럼 결론이 막장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노라면 절로 공감하게 되는 수준까지 이른다.
나라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고, 둘다 사랑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상으로는 시몬과 클레어의 이야기가 중심으로 나오지 않아서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렵지만,
평생을 레즈비언으로 살아온 시몬의 입장에 좀 더 이입하게 되면, 왈리를 선택하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게 된다.
게다가 클레어에게 청혼까지 할 정도라면 이미 이들의 관계는 아주 깊다.
 
사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줄거리를 대충 읽어서, 대충도 아니고 걍 눈에 들어온 키워드 몇개만 보고 틀어서 (오히려 좋았다)
왈리한테 키스했을 때는 진짜 대충격을 먹었다.
레즈비언인데 어떻게 왈리한테 키스를 할 수 있지? 스스로도 놀라놓고서 어떻게 또 찾아가서는 섹스를 할 수가 있지?
나도 '아니 그럼 레즈비언이 아닌거 아니야?'라고 생각했을 정도인데 청혼까지 받은 클레어는 얼마나 배신감이 심했을까.
 
하지만 왈리와 시몬에게는 특별한 미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음식에 관심이 많고 그걸 사랑한다는 공통점.
맥락상 시몬은 왈리가 셰프로 일하는 식당에 거의 매일 가서 점심을 먹는 듯한데,
왈리는 새로운 음식을 내놓을 때마다 긴장하며 시몬의 평가를 기대한다.
유독 음식 앞에서 진지한 시몬, 그녀 앞에서 언제나 긴장하며 본인이 주종목으로 하는 요리를 매번 평가받았는데
세네갈 뷔페 파티에서 시몬이 평소의 진지한 모습을 내려놓고 즐겁게 웃고 편안하게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모습을 봤는데
어떻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또 시몬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식당의 셰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그가
인간으로서 다가와, 사랑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속삭이는데 성적 지향성과는 별개로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시몬은 양성애자인 것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동성애자에 가까운 양성애자가 아닐까 싶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본 이후에서인지, 그냥 어쩌다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동성애 이야기를 다룬 웹툰을 봐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동성애의 사랑 이야기를 거부감 전혀 없이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지는 편이다. 
그래서 어디에선가 동성애랑 이성애가 정확히 나눠지기 보다는 정도의 차이라는 설명을 본 적이 있는데,
이걸 머리로 알고 있어서인지, 사실 나도 종종 멋진 여자를 보면 이상형인 남자를 볼 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심지어는 교제도 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사귀는 게 상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진득히 짝사랑했던 남자애들에 비하면 오래 가진 않았다. 구체적으로 상상도 안되거니와.
 
암튼 그래서 시몬의 입장을 조금만 비틀어서 이입해보면, 평생을 이성애자에 가깝게 살아오다가
나와 너무나도 비슷하고, 내가 사랑하는 걸 똑같이 사랑하고 대화가 너무 잘 통하고 미래가 함께 그려질 정도의 여성을 보면
결혼까지 결심한 남자를 두고도 다른 방식으로 이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의 경우엔 성적으로까지 강력히 이끌린 거고.
 
사실 이런 생각들 보다도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시작되는에 써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따로 있다.
 
종국에는 시몬이 유대인, 반동성애, 반무슬림주의 아빠 앞에서 클레어와 왈리에게 번갈아 키스를 하면서
둘다 자기 애인이고, 자기의 사랑이라고 고백하여 충격을 주고 셋이서 오토바이 타고 저멀리 어디론가 가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데
이들이 정말로 함께 동거를 하고 같이 삶을 살게 된다면 시몬은 양쪽으로 사랑을 받아서 좋겠지만
클레어와 왈리는 애인이 줄 수 있는 사랑의 반만 나눠받게 되는 게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이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이란 개념을,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결혼이란 법적으로 상대방에게 독점성을 어느 정도 부여받는 개념이 맞다고 생각한다.
민법상 이혼 사유 및 위자료 청구가 여전히 되긴 하지만 형법상 간통죄는 사라진 걸로 알고 있는데 
앞서 민법으로 인정되는 것만 봐도 결혼은 상대방의 완전한 자유권을 어느정도 박탈하는 게 맞다. 서로 합의된 공평한 박탈.
그러나 결혼이 사랑도 아니고, 사랑이 곧 결혼도 아니다.
결혼은 법에 쓰여진대로 모두가 동일한 절차(적어도 한 나라 안에서는)를 밟아 결혼에 이르지만 사랑의 형태는 역시나 다양하다.
결혼은 절대로 이 모든 사랑의 종류를 포용할 수 없다.
그래서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 제도가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고.
 
어쨌든 그래서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는 것도, 그 사람의 권한을 일부 가지는 것조차 단순히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시몬과 클레어 사이의 사랑은 여생을 함께 하고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서 곁에 있는 것이고,
시몬과 왈리의 사랑은 사랑하는 일을 함께 하길 꿈꾸고, 그걸 키워나가는 사랑이다.
보통을 셋의 사랑을 그리면 쓰리섬을 그리는 경우(드라마 <와이 우먼 킬>, 영화 <러브>)가 대다수인데, 
솔직히 클레어가 왈리 보자마자 싸대기를 갈긴 것도 그렇고 셋이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건 말이 안되고 상상도 안된다.
이들은 영원히 서로에게 내 애인의 애인인 것이다. 
내 애인의 애인은 내 애인의 (명시적이지만) 사적인 영역이고, 이걸 통제할 권한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애인의 애인이라는 존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채워질 수 있다.
 
이런 생각도 해봤다. 분명히 서운할 부분이 생길텐데.
이를테면 겨울 일요일 오후 5시에 이른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가고 싶을 수도 있는데, 애인이 다른 애인과 선약이 있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하지만 이건 다른 애인이라는 존재로 인해 발생하는 서운함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비단 애인이 아니더라도 친구 또는 가족과 일정, 선약이 있을 수도 있다. 
어느 순간은 내가 우선순위가 분명히 아닐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서운한 감정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나를 향한 사랑이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뭐 다른 애인이 열댓명이어서 누가봐도 사랑이 너무 촘촘히 분할되는 상황이라면 나에게 떨어지는 상대방의 사랑이 콩알만해지는 게 사실이겠지만,
요지는 애인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개개인에게는 사랑의 양이 있고, 어떤 종류의 양을 어떻게 분배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지는 그 사람한테 달렸다.
사랑도 에너지다. 쓸 수 있는 양이 정해져있는 에너지.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 같은 거에 동의하는 게 아니다. 그건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이야기기 때문에 논외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여운이 강렬히 남았던 부분은
내가 사랑에 대해서 그간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깨닫게 해주었단 것이고,
다른 사랑의 종류를 거진 2시간에 걸친 서사와 함께 바라보게 되면서, 더 많은 사랑의 종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사랑이란 키워드에 대해서 오래 생각해본 만큼, 비단 이 영화 내용에 대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란 점은 분명하다.
 
+
덧붙여서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몬은 시몬이 유대인인 것을 알고 혐오하는 반유대교인 왈리의 사촌들이 향해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안식일을 챙기긴 하지만 돼지고기는 먹고, 유대교를 믿지는 않는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라고.

태어난 환경, 자라온 환경을 부정한다기 보단 당연시 되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하고 살아간다는 것.

안팎으로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만나고 부딪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한 자신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것.

그 모습을 구태여 강조하진 않지만 강인한 주인공의 모습을 비춰주면서,

그녀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랑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또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담백하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다.